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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어느 순간 치솟는 - 두 사람이다
- 유라
- 조회 : 9777
- 등록일 : 2009-10-14
경고 - "XXXX가 범인이다"는 말이나 XXX XXX는 XX"정도의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와 만화 "두 사람이다"의 내용이 있으니 알아서 스포일러 주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은 아니지만 대감님과 스님, 이무기가 함께 있던 시절, 집안에 우환이 많아 고민인 대감님이 스님에게 상담을 한다. 스님은 앞산에 이무기가 살아 그렇다며 이무기를 죽여 그 피를 마시고 살을 먹으면 해결이 된다고 조언한다. 대감님은 몸보신을 하지만 내일이면 승천할 이무기는 외친다. “왜 하필 나인 게냐, 왜 하필 오늘인 게냐” 그리고 저주가 내린다.
자자손손 너희 주위의 두 사람을 조심해라.”
그래서 ‘두 사람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언니의 약혼자를 사랑한 여동생은 정말 언니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화에서는 짝사랑하던 그가 결혼식 전날 여동생을 놀이터로 불러 말한다.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녀와 결혼하겠어” 영화에서는 약혼자와 여동생이 사귀었으나 어느 날 언니와 결혼하겠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말한다.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녀와 결혼하겠어” 이유는 모른다.
여기서 두 명의 살인범이 드러난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그녀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놀이터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가 없었다면?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즉, 두 사람은 두 명의 가해자다. 실제 살인을 한 사람과 살의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더해 두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찌르는 사람이 있으면 찔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라는 영화 속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말이 무서운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순간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바뀔 때가 있다. 그렇게 만드는 사람과 말이 있다. 만화 ‘두 사람이다’말하는 표면적인 저주는 아주 작은 감정에 불과한 것을 커다란 악의로 부풀리는 그 무엇을 표현한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원래 이 만화는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괴담에서 출발했다. 예고편에서도 애달프게 엄마를 부르며 안도를 구하지만 엄마역시 안도도 구원도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걱정이 극에 달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라고 외치며 자신을 죽이려 드는 엄마가 어떻게 자신의 엄마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랑의 이름으로 날아오는 폭력을 외면하기 위해 엄마가 아니길 바란다. 차라리 그 순간 무언가에 씌어 엄마가 아니었으면 한다. 모든 괴담이 현실의 공포와 욕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가.
결국 만화 ‘두 사람이다’에 나오는 저주는 어느 순간 상대만 없으면 다 해결되고 자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만을 얘기한다. 또한 ‘살인이 일어난다’가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자 즉, 살인을 기억한 자가 끊임없이 그 순간의 살의를 곰씹으며 살인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진정한 저주다.
영화 ‘두 사람이다’에서는 저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려 할 뿐이다. 죽이려고 하는 살인자는 계속 바뀌고 나름의 근거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용과 상관없다. 뜬금없이 죽이려드는 살인자들이 영화에서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좋은 부분은 오히려 만화에 없던 에피소드다. 여주인공에게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당사자에게 절실한 살의는 근사하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권력이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아 살의가 폭발하는 과정은 설득력 있다. 이 부분에 집중했다면 만화에 나온 ‘이무기의 저주’를 덜어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살인사건을 들려주고 형사의 입을 빌려 “요새 이런 사건이 한두 개도 아니고”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무기의 저주는 없어졌는데 영화는 만화와 똑같이 움직인다. 저주도 없는데 온 세상이 미쳐 주인공을 죽이려드는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기분은 “그래서 뭐야”에 가깝다.
다만 한국 영화에서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정 수준 이상 뽑아낸다. 한국 영화제작진들이 평균적으로 고등학교 관련해서는 괜찮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강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걸까. 관객들이 자신의 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며 몰입하기 때문에 강한 공감을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슬플뿐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은 아니지만 대감님과 스님, 이무기가 함께 있던 시절, 집안에 우환이 많아 고민인 대감님이 스님에게 상담을 한다. 스님은 앞산에 이무기가 살아 그렇다며 이무기를 죽여 그 피를 마시고 살을 먹으면 해결이 된다고 조언한다. 대감님은 몸보신을 하지만 내일이면 승천할 이무기는 외친다. “왜 하필 나인 게냐, 왜 하필 오늘인 게냐” 그리고 저주가 내린다.
자자손손 너희 주위의 두 사람을 조심해라.”
그래서 ‘두 사람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언니의 약혼자를 사랑한 여동생은 정말 언니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화에서는 짝사랑하던 그가 결혼식 전날 여동생을 놀이터로 불러 말한다.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녀와 결혼하겠어” 영화에서는 약혼자와 여동생이 사귀었으나 어느 날 언니와 결혼하겠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말한다.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녀와 결혼하겠어” 이유는 모른다.
여기서 두 명의 살인범이 드러난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그녀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놀이터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가 없었다면?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즉, 두 사람은 두 명의 가해자다. 실제 살인을 한 사람과 살의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더해 두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찌르는 사람이 있으면 찔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라는 영화 속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말이 무서운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순간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바뀔 때가 있다. 그렇게 만드는 사람과 말이 있다. 만화 ‘두 사람이다’말하는 표면적인 저주는 아주 작은 감정에 불과한 것을 커다란 악의로 부풀리는 그 무엇을 표현한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원래 이 만화는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괴담에서 출발했다. 예고편에서도 애달프게 엄마를 부르며 안도를 구하지만 엄마역시 안도도 구원도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걱정이 극에 달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라고 외치며 자신을 죽이려 드는 엄마가 어떻게 자신의 엄마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랑의 이름으로 날아오는 폭력을 외면하기 위해 엄마가 아니길 바란다. 차라리 그 순간 무언가에 씌어 엄마가 아니었으면 한다. 모든 괴담이 현실의 공포와 욕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가.
결국 만화 ‘두 사람이다’에 나오는 저주는 어느 순간 상대만 없으면 다 해결되고 자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만을 얘기한다. 또한 ‘살인이 일어난다’가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자 즉, 살인을 기억한 자가 끊임없이 그 순간의 살의를 곰씹으며 살인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진정한 저주다.
영화 ‘두 사람이다’에서는 저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려 할 뿐이다. 죽이려고 하는 살인자는 계속 바뀌고 나름의 근거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용과 상관없다. 뜬금없이 죽이려드는 살인자들이 영화에서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좋은 부분은 오히려 만화에 없던 에피소드다. 여주인공에게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당사자에게 절실한 살의는 근사하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권력이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아 살의가 폭발하는 과정은 설득력 있다. 이 부분에 집중했다면 만화에 나온 ‘이무기의 저주’를 덜어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살인사건을 들려주고 형사의 입을 빌려 “요새 이런 사건이 한두 개도 아니고”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무기의 저주는 없어졌는데 영화는 만화와 똑같이 움직인다. 저주도 없는데 온 세상이 미쳐 주인공을 죽이려드는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기분은 “그래서 뭐야”에 가깝다.
다만 한국 영화에서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정 수준 이상 뽑아낸다. 한국 영화제작진들이 평균적으로 고등학교 관련해서는 괜찮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강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걸까. 관객들이 자신의 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며 몰입하기 때문에 강한 공감을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슬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