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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비정규직을 돕는 길
- 강성명
- 조회 : 10455
- 등록일 : 2009-07-28
산에 오를 때 정상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만큼 반가운 것이 없다. 숨이 차 헐떡이다가도 표지판에 적힌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면 힘이 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갑자기 숫자를 고친다면 어떻게 될까? ‘정상까지 100미터’란 글을 보고 힘을 내 걷던 사람이‘사실은 1킬로미터 더’라고 쓴 표지판을 본다면? ‘조금만 더 가면 되겠지’하고 젖 먹던 힘까지 짜 냈던 사람들은 마침내 인내심을 잃고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늦추자는 사람들은 길 안내판의 숫자를 바꾸는 것처럼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2년만 지나면 정규직이 될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는다. 이들은 경제 상황이 좋아지면 그 때 가서 법을 시행하는 것이 비정규직들의 대량 해고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누가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가? 2년 혹은 4년 후 경제가 더 나빠지면 또 유예하자고 할 것인가? 오히려 그들은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 했던 고용주들의 마음마저 돌리게 만들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정부와 여당이 법 시행을 늦추려는 움직임을 보인 뒤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기업들의 비율이 급격히 낮아졌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고, 해고가 수월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건 분명 기업에 부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 직원을 뽑고, 업무를 가르치는 일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 따라서 모든 고용주들이 비정규직법 때문에 숙련된 일꾼들을 내몰고, 새 직원을 뽑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7월 100만 해고 대란설’은 논리와 근거가 부족한 과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기업의 몫이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바람직한 선택을 유도할 의무가 있고, 그럴 힘을 가졌다.
법을 원안대로 시행하는 것과 동시에, 비정규직의 수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최근 정부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법인세를 감면하겠다고 밝혔다. 정규직 전환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는 기업에게만 그 혜택을 주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정부가 비정규직을 줄이겠다는 확실한 신호를 시장에 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와 더불어 이명박 정부가 기업만을 위한다는 비판도 줄어들 것이다. 대통령이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 먹는다고 해서 서민을 위한 정부라고 믿어 줄 국민은 없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려는 구체적인 정책을 펼 때 ‘일하는 사람을 위한 정부’라는 믿음이 생긴다.
정부는 노동 유연성이 높을수록 경제가 성장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의 경제 강국들을 예로 든다. 실제로 덴마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매우 높은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나라의 해고 노동자는 실업급여를 무려 4년간 받고, 그 액수는 전 직장에서 받은 임금의 90%나 된다. 또한 각종 취업교육 등을 마련해 대부분 바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덴마크가 고용에서 ‘유연성’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안정성’이다. 반면 언제 해고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고, 일자리를 잃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800만 비정규직들을 위해 우리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간디는 ‘불필요한 법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했다. 나는 ’법을 입맛대로 바꾸는 것도 폭력‘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동일 노동, 차별 임금’의 억울함을 삭이면서도 법을 믿으며 2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경제 위기를 이유로 법 시행을 늦추자는 말은 그들을 분노하고 절망하게 만들 뿐이다. ‘한 회사에서 2년을 근무한 기간제 근로자는 정규직 혹은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해 주어야 한다’는 비정규직보호법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고, 정규직 전환을 촉진할 구체적인 지원책도 마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감세 정책 등 기업에게 제공하는 모든 지원을 정규직 전환과 같은 고용 문제와 연결하고, 어려운 중소기업들을 위해서는 정규직 전환금과 같은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많은 비정규직들이 희망으로 삼았던 표지판을 훼손하지 말자. 산은 다시 오르면 되지만, 삶은 포기하면 다시 시작할 수 없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모두가,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해선 안 될 소중한 삶이 아닌가.